[올마일기 #2]
안녕하세요, 올마입니다. 첫 번째 글에서 아이 없는 삶을 즐기던 제가 7년 만에 엄마가 된 이야기를 들려드렸죠. 오늘은 그 기적 같은 기다림 끝에 찾아온 아이에게 제가 준 '첫 번째 선물'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바로 "태명(胎名, Fetal Nickname)" 입니다.
"The Baby" 혹은 "It" 이라 불리던 영국 병원
제가 영국에서 임신 5개월을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와 출산한 경험이 있는데요. 보통 영국 의료진들은 뱃속의 존재를 아주 객관적으로 부릅니다. 주로 'The Baby', 성별을 알기 전에는 심지어 'It(그것)' 이라고 지칭하곤 하죠.
미국의 육아 전문가 로빈 엘리스 와이스(Robin Elise Weiss)는 태명을 짓는 이유를 매우 실용적으로 설명합니다.
"파트너와 단둘이 공유하는 암호로 쓰거나, '그것'이라고 부르는 대신 유대감을 쌓기 위한 재미있는 별명" 정도라고요. 그래서 그들이 추천하는 태명도 Peanut(땅콩), Jelly Bean(젤리빈)처럼 가벼운 것들이 주를 이룹니다.
가장 재미있었던 태명은 **"BIP 2.0"**이었어요. BIP은 'Baby In Progress(성장 중)'라는 뜻이고, 2.0은 아기 몸무게였죠. 참 서구적인 발상이죠?

이어령 교수가 일깨워준 'K-태명'의 위엄
놀라운 인연 하나를 소개할까 해요. 제가 영국에서 유명 블로거로 활동할 때 쓴 태명 글을 보시고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 후 故 이어령 교수님이 2020년에 출판하신 《한국인 이야기》에 제가 쓴 우리 아이의 태명 에피소드가 그대로 실리게 되었죠. 제게는 가문의 영광 같은 일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그 책을 읽으며 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교수님은 한국의 태명 문화를 세계 어디에도 없는 "생명 존중의 정점" 이라고 정의하시더군요.
"서양에서는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 눈을 맞춰야 비로소 인격체로 대접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뱃속에 생명이 깃든 순간부터 고유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태명은 아이를 '그것'에서 '너'로 바꾸는 마법이다."
확실히 서구의 태명이 유대감을 위한 '별명'이라면, 한국의 태명은 '태아의 인격'을 완성하는 단계까지 나아갑니다.

7년의 침묵을 깨고 지어준 이름, "까롱이"
7년이라는 긴 기다림 끝에 신랑이 지어준 이름은 '까롱이' 였습니다.
《한국인 이야기》 p.33~34 발췌
"태명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OO이가 드디어 '까롱이'라는 멋지고 독창적인 태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던 중 마카롱을 난생 처음 먹은 신랑이 그 모양과 맛이 너무 귀엽고 달달해서 생각해낸 이름이라는 거다. (중략) '까롱이'라면 유럽에서도 통하고 한국에서도 통하는 글로벌 시대의 모범 답안이다."
ENTP인 저는 특별한 태명을 짓고 싶어 스트레스만 받다가, 무심결에 신랑이 지어준 '까롱이'라는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름을 부르면 뱃속에서 전해지던 '툭-' 하는 태동. 그것은 교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상호작용"이었습니다.
물론 에피소드도 있었죠. 친정엄마는 '까롱이'가 못마땅하다며 '축복이'로 바꿔 부르셨고요, 생각해보니 신랑 성이 조 씨라 '조...까롱' 이 될 뻔한 위기(?)도 있었답니다. (욕 아니에요! ㅠㅠ)

가장 위대한 한류는 '생명 인식'에 있습니다
요즘 전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지만, 제가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한류는 우리만의 '생명 인식' 이었습니다. 故 이어령 교수님에 따르면 주변 국가인 일본과 중국조차 태명 문화는 없다고 합니다.
태명이야말로 K-육아의 진정한 시작인 셈이죠. 서양 칼럼에서 태명을 '비밀 암호'로 정의할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태명은 아이를 '그것'에서 '너'로 불러내는 생명의 첫 울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는 이유도, 뱃속에서 이름을 불리며 보낸 10개월을 온전한 인생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아기에게 어떤 태명을 속삭여 주셨나요?
그 짧은 이름 안에 담겼던 뜨거운 사랑을 오늘 한 번 떠올려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