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마일기 #19] 안녕하세요, 올마입니다. 지난 글에서 대치동 지인 딸의 서울대 합격 비결로 '결핍'을 꼽았었죠. 사실 그 글은 독자분들에게 드리는 메시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저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절절한 반성문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18편의 이론적인 이야기를 넘어, 제가 영국 땅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깨달은 '결핍의 실체'에 대해 고백해 보려 합니다.
📍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 '햇반 30개'의 함정
저는 늦은 나이에 영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거창한 야망이나 절실함이 있어서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고시 준비를 하다 실패하니 할 게 공무원 시험밖에 없더군요. 특별한 꿈도 없었습니다. 그저 부모님이 잘 차려준 환경에서 아무 걱정 없이 대학 졸업하고, 남들이 하니 따라 했던 고시에서 쓴맛을 본 케이스였죠.
다시 시작된 아빠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등 떠밀리듯 떠난, 소위 '무색무취'의 출발이었습니다. 요리 1도 못 하는 딸이 걱정되신 아빠는 이민 가방이 터져나갈 듯 햇반 30개를 꽉꽉 채워주셨습니다. 타지에서 딸자식 굶을까 봐 걱정된 눈물겨운 사랑이었죠. 하지만 영국에 도착한 첫날, 그 햇반 30개는 제게 사랑인 동시에 '무능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20대 중반에도 저는 밥 한 끼 제 손으로 할 줄 모르는 '온실 속 화초'였거든요.
처음에는 하루에 두세 개씩 먹으며 룰루랄라 했습니다. 그러다 점점 줄어드는 햇반을 보며 하루에 한 개, 나중에는 이틀에 한 개씩 아껴 먹으며 한 달을 버텼습니다. 31일째 되던 날, 마지막 햇반이 사라지자 제 유학 생활엔 진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 일본 친구들의 돈가스 구호물자와 자괴감
밥 짓는 법도, 식재료를 고르는 법도 몰랐던 저는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공용 주방에서 만난 20대 일본 여학생들은 저에게 문화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능숙하게 식재료를 손질하고, 직접 바삭한 돈가스를 튀기고, 정갈한 미소 수프를 끓여 먹고 있었죠.
매일 라면 냄새만 풍기는 제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을까요? 어느 날 그 친구들이 갓 튀긴 돈까스와 따뜻한 수프를 제 접시에 나눠주었습니다. 고마움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무척 쓰라렸습니다. '곧 있으면 서른이 되는 석사생인 내가, 20대 학부생들이 챙겨주는 밥을 얻어먹고 있다니...'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한국에서 공부 잘하고 똑똑하다고 자부했던 저는, 사실 생존 지능이 0에 수렴하는 '생활 바보'였다는 것을요. 부모님이 챙겨주신 풍족한 환경이 제 생존 근육을 완전히 퇴화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 요리 잘하는 신랑, 그리고 멈춰버린 자립의 근육
배고픔이라는 결핍이 닥치자 저는 그제야 요리 잘하는 일본 친구를 스승 삼아 마트를 누볐습니다. 어떤 고기가 신선한지 배우며 조금씩 생존법을 익혀가던 찰나, 제 인생에 또 한 번의 거대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어느 주말, 기숙사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요리 기가 막히게 하는 한국 남학생이 왔다"고요. 그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지금의 제 신랑입니다. 운명처럼 신랑을 만나게 되면서 제 처절했던 '자립기'는 급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신랑이 차려주는 따뜻한 집밥 덕분에 제 생활은 다시 안락해졌고, 굶주림에 헐렁해졌던 옷들도 다시 제 자리를 찾았죠. 😊
음식 못 하는 아내를 위해 기꺼이 국자를 든 신랑 덕분에 행복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안주'였습니다. 부모님의 햇반이 신랑의 요리로 바뀌었을 뿐, 제가 스스로 고민하던 '생존의 시간'은 다시 멈춰버린 것이죠.

✍️ 우리 아이들에게 '햇반 31일째'를 허락하세요
우리 신랑은 딸바보라 "자기 같은 사위를 만나면 좋겠다"고 하지만, 저는 제 아이를 저처럼 키우지 않습니다. 저 역시 바쁜 엄마이기에 방학 동안 딸은 동생 밥을 차려 먹이고 설거지까지 합니다. 때로는 직접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도 하죠. 신랑은 "너는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왜 애를 시키냐"라고 하지만, 저처럼 만들 순 없잖아요!
다행히 우리 딸은 아빠를 닮아 요리하고 집안일 돕는 걸 잘합니다. 어디 내놔도 잘 살 것 같은 아이기에 엄마인 저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러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의 앞길에 햇반을 깔아주지 마세요. 오히려 아이가 햇반이 떨어진 '31일째의 막막함'을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 배고픔이야말로 아이를 철들게 하고, 스스로 생각하게 하며, 진짜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가장 위대한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요리 잘하는 신랑을 만난 건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지만, 한편으론 제 '생존 근육'이 다시 잠들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이에게만큼은 '운 좋은 만남'을 기다리게 하기보다, 어떤 황무지에 떨어져도 스스로 밥을 짓고 길을 찾는 '자생력'을 먼저 선물하고 싶습니다."
저도... 이제 우리 아이 그냥 좀 놔둬봐도 되겠죠? 😊 (여보, 그래도 매일 저녁 해줘서 고마워! ❤️)
여러분은 자녀에게 어떤 '햇반'을 챙겨주고 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