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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아줌마도 "Bloody 명절증후군!", 만국 공통인가?

by 올마 2026. 2. 17.

[올마일기 #34] 안녕하세요, 올마입니다. 올해 설날 '효도 데뷔전' 이야기를 쓰다 보니 문득 15년 전 제가 영국 캔터베리에서 목격했던 흥미로운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저는 '영국품절녀' 블로그를 운영하며 영국인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었는데요. 2011년 9월, 명절을 앞두고 썼던 글을 다시 꺼내 보니 사람 사는 모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참 비슷하다는 생각에 웃음이 납니다.

 

👉[참고: 15년 전 영국품절녀 블로그 원문 보기: 영국 아줌마도 피해갈 수 없는 명절 증후군]

 

1. 15년 전 영국에서 목격한 'Grumpy Old Women'

그 당시 저는 영국의 인기 TV 프로그램인 <Grumpy Old Women(불평 많은 여자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아하고 차분할 것만 같은 영국 아줌마들이 크리스마스 명절을 앞두고 TV에 나와 이렇게 절규하고 있었거든요

 

"Bloody Christmas!(빌어먹을 크리스마스!)"

"Cooking, Cooking, Cooking! (하루 종일 요리, 요리, 요리!)"



영국 명절 증후군 BBC Grumpy Old Women
영국 명절 증후군: Grumpy Old Women at Christmas (출처: BBC)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하루 쉬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의 설날이 집약적인 '노동의 정점'이라면,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12월 내내 이어지는 '장기전'에 가깝습니다. 수십 명의 친척에게 보낼 카드를 일일이 쓰고, 집안 구석구석을 장식하며, 거대한 칠면조 요리를 준비하는 모습은 흡사 국왕의 대관식을 단독으로 준비하는 비장한 '집사'(Butler)'같아 보였습니다.

 

특히 그녀들을 절규하게 만드는 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선물 노동'입니다. 한번은 영국 아이들이 선물 자랑하는 걸 들었는데, 한 아이가 아주 당당하게 "난 선물을 4개나 받아!"라고 외치더군요. 알고 보니 부모님이 이혼 후 각자 재혼을 하셔서 친엄마·아빠는 물론 새엄마·아빠에게까지 선물을 받게 된 것이었죠.

 

 

아이에게는 '선물 4배'의 기쁨이겠지만, 그 뒤에서 전 남편의 아이와 현 남편의 아이, 그리고 얽히고 설킨 친척들의 취향을 맞추느라 '고난도 선물 큐레이팅'을 감당해야 하는 영국 아줌마들의 고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 달 전부터 이 보이지 않는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크리스마스 당일 칠면조 다리를 부여잡고 "Bloody!"를 외치는 건 그녀들의 정당한 권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설날 연휴 며칠만 바짝 고생하면 되지만, 한 달 내내 명절을 '준비'해야 하는 그녀들은 어쩌면 우리보다 더 혹독한 명절 증후군을 겪고 있는 셈입니다.

 


2. 영국판 명절 증후군: '재뉴어리 블루스(January Blues)'

 

영국인들은 명절이 끝난 1월을 'January Blues(재뉴어리 블루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화려했던 축제가 끝나고 나면 남는 것은 산더미 같은 설거지 거리와 연말에 긁어댄 카드 고지서, 그리고 지독하게 흐린 영국의 겨울 날씨뿐이죠.명절 내내 가족 뒷바라지에 진을 뺀 영국 아줌마들이 "다시는 명절 안 해!"라고 외치며 우울감을 느끼는 모습은 한국의 '명절 증후군'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습니다.

 

  • 한국: 전 부치기와 시댁 방문의 스트레스
  • 영국: 선물 고르기와 칠면조 요리의 압박


표현하는 방식과 메뉴는 달라도, 가족을 위해 완벽한 명절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성들의 심리적 부담감은 국경이 없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재뉴어리 블루스'를 영국의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훨씬 더 깊고 지독하게 겪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슬픈(?) 이유가 있습니다.

 

영국 겨울 날씨 재뉴어리 블루스 캔터베리 풍경
15년 전, 영국인들조차 우울해하던 캔터베리의 겨울 날씨 (출처: 영국품절녀 블로그)

 


첫째는 '감정적 탈진' 입니다. 크리스마스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해 한 달 내내 가족들의 취향을 맞추고, 선물을 준비하고, 분위기를 띄우던 '집사'로서의 긴장이 1월이 되면 한꺼번에 풀려버리는 거죠. 

둘째는 '현실로의 강제 복귀'입니다. 파티는 끝났는데, 거실엔 치워야 할 트리와 장식물, 그리고 무리해서 긁은 카드 고지서가 남습니다. 가계부를 책임지는 여성들에게 이 고지서는 날씨보다 차가운 현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생물학적 요인'입니다. 일조량이 부족하면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급격히 줄어드는데, 여성들이 이 변화에 더 민감하죠. 안 그래도 11월부터 오후 4시면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인데, 명절 노동까지 겹치니 1월의 여성들은 말 그대로 '방전' 상태가 됩니다.

 

오죽하면 영국 남자와 결혼한 제 한국인 지인 언니의 경우, 예비 신랑이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해요.
"결혼 전 1월에는 절대 영국 오지 마. 이 우울한 날씨를 보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니까!"
결국 언니는 영국의 하늘이 가장 예쁘다는 8월에 영국 땅을 밟아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다는 '다행스러운 후문'이 전해집니다. 12월의 그 열정적인 "Bloody!"는 어쩌면 이 텅 빈 잿빛의 1월을 견디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3. 명절의 끝은 '후유증'이 아닌 '설렘'


15년 전 영국 아줌마들의 절규를 그저 관찰자의 시선으로 기록했던 저는, 이제 한국에서 직접 상을 차리는 며느리가 되어 그분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저에게는 '명절 증후군'을 단번에 날려버릴 특별한 처방전이 생겼습니다. 명절 밥상을 맛있게 드시고 4시간 30분 만에 쿨하게 '명절 칼퇴근'을 선언해 주신 시부모님 덕분에 남은 연휴를 온전한 휴식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거든요.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고생하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슬쩍 제안했습니다.
"어머니, 우리 다가오는 추석에는 음식 하지 말고 다 같이 가족 여행 가요!"

그 말에 어머니는 "어머, 정말? 그럼 내가 지금부터 여행 경비 열심히 모아놓을게!" 하시며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그 설레는 표정을 보니 영국인들의 '재뉴어리 블루스'도, 한국 며느리들의 '명절 스트레스'도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이 1월의 우울함을 달래려 미리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듯, 저도 이제부터 시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자로 만들어 드릴 '추석 여행 프로젝트'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명절의 끝은 후유증이 아니라, 다음 만남을 향한 기분 좋은 기다림이어야 하니까요. 여러분의 명절 마무리도 저처럼 '설렘'으로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명절 증후군 극복 커피 한잔의 여유 올마일기
명절 증후군 극복 커피 한잔의 여유

 

 

✍️ 올마의 다정한 참견: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커피' 한 잔의 여유

영국 아줌마들은 명절 증후군을 진한 홍차 한 잔과 수다로 달랬을 겁니다. 2026년 설날, 저는 시부모님이 선물로 가져오신 맛있는 콜드브루 원액과 제가 좋아하는 휘낭시에로 기분 좋은 피로감을 씻어내려 합니다. 명절 끝에 몰려오는 피곤함은, 우리가 그만큼 가족을 뜨겁게 사랑하고 애썼다는 훈장 같은 것 아닐까요? 지금 이 시간, 명절 증후군으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계실 모든 '올마'님들께 영국의 티타임 같은 평온함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참 잘해냈어요!, 다음 올마일기는 '영국 엄마들의 교육 철학' 이야기로 찾아올게요!"